어느 면에서 시詩는 시時이기도 합니다. 시는 어떤 시간감, 즉 리듬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이 리듬은 시인이 무엇인가를 낯설게 느꼈을 때, 그리고 그것을 새로운 말로 옮기려고 할 때 것입니다. 하늘에 연을 날릴 때 바람을 기다리는 것처럼, 시를 읽으면서 우리는 자신의 리듬을 시인의 그것에 맞추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마음의 여유가 없다면 이런 시도는 애초에 불가능하겠지만 말입니다.
강신주,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17쪽 참조.
오늘 밤 10시 대한민국 첫 경기
한 주 동안 서효인+박혜진의 《읽을 것들은 이토록 쌓여가고》(난다, 2018년)와 즐거운 데이트, 독서 시간을 행복하게 가졌다. 그 덕분일까, 내 책상에는 읽을 것들이 나무처럼 숲으로 자라나고 있다. 《읽을 것들은 이토록 쌓여가고》에서 좋은 책을 소개한 까닭에 최든 들어 나는 알라딘 중고서점을 이용해 《죽는 게 뭐라고》, 《사는 게 뭐라고》, 《너랑 나랑 노랑》, 《책기둥》을 엊그제 구입했고, 오늘은 친구와 점심 약속 와중에 잠깐 짬을 내서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피로사회》(문학과지성사, 2012년)를 지하에서 얼른 들고 밖에 나왔다. 점심은 칼국수. 지난 주에 그 친구와 일주일 만에 또 수원 남문 통큰칼국수집을 찾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칼국숫집을 찾아가는 수원 남문시장 길목에서 친구와 나는 약 5분 쯤 걸으면서 잠깐이지만 이런 대화를 나눴을 것이다.
_ 오늘밤 10시?
= 응, 알아. 축구.
_ 이따, BYC 매장 들리자
= 거긴 왜?
- 응, 지난 번 2장 샀는데, 4장 더 사야 할 것 같아서
= 그래. 알았어!
_ 너, 오규원 시인의 「죽고 난 뒤의 팬티」라는 시 알지?
= 몰라.
_ 왜, 한 잎의 여자 쓴 시인 있잖아?
= 아, 그 시인이 쓴 시가 그거야. 근데 그 시는 왜?
_ 요즘 내 고민이 그거 거든. 죽은 뒤에 내 속옷이 더럽게도 신경 쓰여서 말이야~
= 그러니까, 팬티와 빤스의 그 절묘한 차이? (웃음)
어느덧 식당에 도착했다. 그렇게 우리의 대화는 약속한 것처럼 끝이 났다. 오늘도 가게 앞에서 대기했다. 줄을 짧게나마 섰다. 다행히 오늘은 내가 먼저 지갑에서 만원 지폐를 쓰윽 꺼냈다. 순식간, 주인아줌마는 내 손에 쥔 지폐를 독수리가 그렇듯이 낚아채갔다. 각설하고.
팬티와 빤스의 차이란 무엇인가
여러분은 혹시 팬티와 빤스의 차이를 잘 아시나(요)?
정답은 이렇다. 팬티는 외출용으로 한마디로 브랜드이고 빤스는 집구석용이고 시장에서 파는 보급형이라고. 이렇듯 코믹하게 구분되어 정의할 수 있다. 다음은 손현숙 시인의 기발한 시로 「팬티와 빤스」가 제목이다. 이 시에서 우리는 팬티와 빤스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인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팬티와 빤스/손현숙
외출을 할 때는 뱀이 허물을 벗듯
우선 빤스부터 벗어야 한다
고무줄이 약간 늘어나 불편하지만, 편안하지만,
그래서 빤스지만 땡땡이 물무늬 빤스
집구석용 푸르댕댕 빤스는 벗어버리고
레이스팬티로 갈아입어야 한다
앙증맞고 맛있는 꽃무늬팬티 두 다리에 살살 끼우면
약간 마음이 간지럽고 살이 나풀댄다
나는 다시 우아하고 예쁜 레이스공주
밖에서 느닷없이 교통사고라도 당한다면
세상에, 땡땡이 빤쓰인 채로 공개되면 어쩌나
비싼 쎄콤장치로 만약의 위험에 대비하듯
유명 라펠라 팬티로 단단한 무장을 한다
오늘 바람이라도 살랑, 불라치면
혹시라도 치마가 팔랑, 뒤집힌다면
나 죽어도 꽃무늬 레이스로 들키고 싶다
_ 마릴린먼로(사진). 나 죽어도 꽃무늬 레이스로 들키고 싶다는 표정이란 영화 속 장면처럼 그런 것이지 싶다.
앞의 시는 손현숙(1959~ ) 시집 《손》(문학세계사, 2011년)에 보인다. 특히 시의 마지막을 차지하는 3행은 그림 같고 영화 같아서 백미로 정녕 다가온다.
시적 화자가 영화 속 주인공 마릴린먼로(사진)의 예술적이고 섹시한 표정과 몸짓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바람’, ‘살랑’, ‘치마’로 이어지는 시어 뒤에 유명 라펠라 팬티라니.
죽어도 나는 ‘꽃무늬 레이스’ 팬티로 입은 채 들키고 싶다고 그러니. 바람결에 훔쳐서라도 보고픈 관음증이 내게도 훅, 하고 밀려온다.
성적 본능이 독자로 하여금 빳빳하게 발기될 것이다. 그래서 엄지와 검지로 살짝, 시나브로 동그라미를 미소와 함께 그리게 된다.
그래서 그랬던가. 오늘 아침에 1차로 완독을 끝낸 일본의 유명 그림책 작가 사노 요코(佐野 洋子, 1938~2010)의 《죽는 게 뭐라고》라는 책에서 이런 구절에 밑줄을 그어야만 했다. 다음이 그것이다.
암은 앎, 앎은 아름다움
어느 날 겉옷을 벗자 정확히 속옷의 왼쪽 부분만 선을 그은 듯 더러워져 있었다. 이상하게 여기며 세탁기에 던져 넣었다. 다음 날 또 속옷이 왼쪽만 거뭇거뭇해져 있었다. 셔츠를 벗고 팬티를 보았다. 팬티도 반쪽만 거무스름해져 있었다. 저림이 자기磁氣를 내뿜어서 속옷을 물들인 걸까.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사오 요코, 이지수 옮김 《죽는 게 뭐라고》, 마음산책, 2015년. 124쪽.
암 환자로 더러워진 속옷 팬티에 신경을 쓰는 사노 요코의 여자로서 나이는 일흔(70세). 그 나이에도 치마를 사입고 속옷에 집중해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보자면 ‘죽을 의욕 가득’(책의 원제)한 암 환자로 전혀 상상되지 않았다. 이 책을 흥미롭게 읽으면서 말이다. 책의 뒷면에는 백영옥(소설가)의 추천사가 나온다. 사람은 삶이 되고 암은 앎이 된다는 소설가의 안목이 그저 놀랍다. 곱씹을수록 말이 감동적이다. 다음이 그 간추린 내용이다.
이 책의 일본어 원제가 ‘죽을 의욕 가득’이라는 걸 알고 나서 문득, 풍경 하나가 떠올랐다. (중략) 21세기에 가장 유명한 암 환자였던 스티브 잡스가 죽음을 “삶의 최고의 발명품”이라 말한 아이러니는 이렇게 이해해야 마땅하다. ‘사람’을 빠르게 치려다 오타가 생기면 종종 ‘삶’이 된다는 걸 아시는지. 이 책은 암에 걸렸지만 담배 따위 끊지 않고, 환자가 아니라 사람으로 죽고 싶어 하던 박력 있는 할머니가 ‘암’에 대해 적어 내려가다가 문득 ‘앎’에 이르게 된 사려 깊은 오타 같다.
같은 책, 백영옥(소설가) 추천사
그렇다. 암에 굴복하지 않는다면 그 인생은 앎이 이력이고 그의 경력이 된다. 앎은 그래서 언제나 어두운 구석이 없으므로 빛으로 타자에게 드러난다. 그러니 앎이야말로 찐 인생의 아름다움이 되는 것이다. 나는 대한민국 시인들 중에서 유독 오규원(吳圭原, 1941~2007) 시인의 앎이 꼭 그러했지 싶다. 폐기종으로 10년 동안 투병했다는 시인의 삶은 끊임없이 ‘사람’에 바탕하고 천착하는 감각을 여실히 독자에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름 석 자는 영원히 인구에 회자될 것이라고 나는 전망하고 확신한다. 어쨌든, 오규원의 명시 「한 잎의 여자」와 더불어 가장 많은 독자가 사랑하는 명시 「죽고 난 뒤의 팬티」를 보자. 다음이 그것이다.
_ 철학자 강신주의 저서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동녁, 2011년)를 어제부터 네 번째로 독서하고 있다. 이 책(290쪽)에서도 「죽고 난 뒤의 팬티」가 등장한다.
죽고 난 뒤의 팬티/오규원
가벼운 교통 사고를 세 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시속 80킬로만 가까워져도 앞 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
티를 갈아 입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산 者(자)도 아닌 죽은 者(자)의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 죽고 난 뒤
에 팬티가 깨끗한지 아닌지에 왜 신경이 쓰이는지 그게 뭐가 중요
하다고 신경이 쓰이는지 정말 우습기만 합니다. 세상이 우스운 일
로 가득하니 그것이라고 아니 우스울 이유가 없기는 하지만.
명시 「죽고 난 뒤의 팬티」는 오규원 시집 《이 땅에 씌어진 서정시》(문학과지성사, 1981년)가 그 출처이다. 그러니까 손현숙의 「팬티와 빤스」와는 20년 차이가 격세지감 벌어진다. 이렇듯 마흔의 남자와 오십의 여자는 어느 날 닥쳐올 죽음을 생각하고, 자신의 팬티가 깨끗한가(남성의 시선)와 자신의 팬티가 예쁜가(여성의 시선)를 두고 견해를 달리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시인의 태도는 사노 요코처럼 ‘죽을 의욕 가득’한 충만한 마음에서 기인되어 세상을 해석하고 전망한다는 점에서 시는 각기 이성(異性)을 향해서 현존하는 삶을 돌아보게 날이 세워진다. 독자를 토닥토닥 위안으로 다독인다.
나는 오늘, 점심을 먹고 나서 수원 남문시장 BYC 매장에서 하얀 런닝구(95 사이즈) 4 장을 샀다. 다음 기회에는 빤스가 아닌 팬티도 몇 장 사려고 계획 중이다. 왜냐하면 집에 빤스는 많은데 팬티가 하나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 구멍났다. 찢어지거나 해졌고 변색됐다. 어찌 더 구멍나고 찢어진 팬티로 외출할 수 있으랴. 나도 벌써 죽을 나이다. 가까이에 오고 있어서다. 영광스럽게도 내년이면 나도 육십. 이 나이를 숫자로 인생에다 단다.
사노 요코처럼 나도 시크한 독거 작가로 살다가 아름답게 죽고 싶다. 오규원 시인은 나이 마흔에 벌써 그것을 깨우쳤는데 그보다도 10년이나 각성에서 늦었으니 어찌 하랴.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라고 생각해야지. 뾰족한 수가 없긴 하다. 그러니까 빤스가 아니라 팬티로 갈아 입었는지 외출할 때마다 항상 확인하는 습관을 이젠 들일 수밖에. 뭐, 별 수가 없다. 죽는 게 뭐라고.
오늘 밤 10시 대한민국 첫 경기가 시작된다. 그런 오늘은 2022년 11월 24일.
요일은 목요일이다.
다들 10시 지나서 크게 함성을 외칠 테지. 철학자 강신주의 저서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동녁, 2011년)를 어제부터 네 번째로 독서하고 있다. 이 책(290쪽)에서도 「죽고 난 뒤의 팬티」가 등장한다. 다시 그 부분부터 나는, 축구가 끝나고서 곧장 훑어볼 요량이다.
와, 동네가 곧 응원의 함성으로 메아리 퍼지고 들썩댈 것이다. 이겨라. 우리 나라가 이겨야 할 텐데. 하~ (沈)